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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학원 설립자 조용기 박사 국민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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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5-14 21:27 조회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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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기도의 힘 변하지 않아… 청년·학생 위해 손 모을 때”
○ 일시 : 2021. 05. 14
○ 내용
[전정희 선임기자의 샬롬]
'이수정 선교사 생가터’증언
우암학원 조용기 설립자

“…해방되자마자 내가 나가서 광주YMCA 창설 당시 총무간사를 봤어. 그때 최흥종(1880~1966·독립운동가) 목사, 그 양반이 회장을 하시고 정인세(1909~1991·빈민운동가) 선생이 총무를 했어. 내가 나가니 ‘너 잘 왔다. 내 조수 노릇해라’ 한 것이…그 일이 급사여 총무간사라고 이름 붙였어도 급사여. 거기서 그 양반(정인세)이 초안해 준 것을 (등사)기름종이에 쓰면 잘 안 써져. 그놈을 그래도 잘 밀어. 그걸 노나주고. 그것이 일종의 전도여.”

광주·전남지방 ‘우암학원’ 설립자 조용기(95) 학원장은 덧붙이거나 빼는 경우가 없었다. 한 세기를 살아온 신앙 원로의 솔직한 고백이 묻어났다. 그의 구술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이어진다. 현대사의 진실을 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수정(1842~1886·최초 성서 한글 번역자) 선생에 대한 증언(국민일보 2021년 2월 6일자 8면 참조)이 한국교회사 인물인 이수정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출생지에 관해 명확하지가 않았거든요.

“제가 선생의 고향 전남 곡성 옥과(조선시대 옥과현) 출생입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등의 박해를 피해 집 뒤 설산(525m) 불광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어요. 그 깊은 산속에 덕골이라는 이씨 집성촌이 있었죠. 승려와 그 마을 어른들께서 이 동네가 큰 벼슬(도승지)한 이수정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거예요. 선생의 선대가 정치적 수난으로 깊은 산속에 숨어들었다는 겁니다. 지금 그 자리가 광주 성림교회 수양관이 돼 있습니다.”

-옥과교회에 이수정기념실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습니다. 옥과교회에서 우암학원을 시작하셨지요.

“옥과교회는 미 남장로회 광주선교부 타자마(1910~1955·한국선교) 선교사 부부가 사역했습니다. 제 종형 조용택(1902~1950·순교) 전도사가 타자마의 조사를 하며 옥과교회를 이끌었고요. 제가 미션스쿨 광주 숭일중학 교사를 그만두고 1946년 9월 고향에 돌아와 예배당에서 학교를 시작했어요. 너나없이 가난하게 자랐고 고향 사람들도 그랬죠. 저는 고향 교회를 통해 자각했으니 복 받은 사람인 거죠. ‘배워야 한다. 그래야 가난을 면하고 화목한 신앙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알았죠.”

- 우암학원의 설립이념이 삼애정신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愛天), 인간을 존중하고(愛人), 나라를 사랑한다(愛國)인데요.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교육가인 그룬트비(1783~1872)의 삼애정신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그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관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땅을 사랑하자’고 역설하며 기독교교육을 실천, 덴마크를 중흥시켰지요. 저는 제가 태어난 자리(전남과학대·옥과고)에 천막 교실을 지으며 그룬트비처럼 기도로,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을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룬트비 기독교교육철학은 6·25전쟁을 전후해 대전의 배민수(목사), 김해의 강성갑(목사·순교)과 함께 기독교농민학원 운동으로 발현됐다. 호남 축이 조용기 설립자였다.

-한데 태어나신 집터에 불을 지르셨다면서요.

“목탄 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나와 예배당에 옥과농민학원을 세웠잖아요. 그런데 넘쳐나는 인원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집터에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내 집터를 일본 놈들이 빼앗아 신사가 세워졌거든요. 그러나 해방되고 그 신사 자리가 무속인들의 굿 자리가 됐어요. 미신이 국민의 생사화복을 주관해요. 배우지 않으면 평생 휘둘리고 사는 거죠. 밤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군청에 쫓아가 구호물자 천막 좀 달라고 통사정했습니다. 그 자리에 천막 교실 하나, 교무실 하나를 세웠어요.”

-이 지역이 ‘백아산 전투’ 등으로 빨치산 출몰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학교 운영에 피해가 없으셨습니까.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자 등 배운 청년들이 입산해 빨치산이 되는 게 너무 안타까웠지요. 특히 백아산은 학교 남쪽이에요. 여순반란사건 이후 빨치산들이 백아산 지리산 무등산 등지에 거점을 틀고 출몰하곤 했어요. 그들이 6·25전쟁 때까지 후방을 교란했어요. 1949년 전후인가 빨치산들이 백아산에 사단본부까지 만들어 공세를 펼쳤는데 거기에 잘 아는 청년들이 있었어요. 선을 넣어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들 거기 있으면 죽는다. 하루빨리 내려와라’고 권했습니다. 한 사람은 우리 학교(당시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 음악 교사, 다른 한 사람은 국어 교사가 됐어요. 평생 저와 함께 후학을 길러 냈습니다.”

1950년대 기술학교는 옥과고교, 옥과중학(2004년 공립 전환)으로 개편된다. 그리고 1990년대 우암학원은 전남과학대, 남부대(광주) 등으로 확장됐고, 2000년대 곡성시니어클럽과 우암병원, 우암유치원·어린이집 등이 설립되면서 평생교육의 장이 됐다. 그는 2000년 초 한국사학법인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사학법 개정 반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합니다. 소망이 있으신가요.

“철판에 대고 필사한 교재로 문맹을 탈출했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기도의 힘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암학원을 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입학 및 졸업식, 간호·치위생과 나이팅게일 선서식 등에 쓰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로 우뚝 세워지게 하소서’라고 소망합니다. 청년·학생들을 위해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 소망은 무덤에 ‘성도 조용기’로 남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곡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90960&code=23111318&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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