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이수정 성서 기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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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2-15 12:25 조회1,5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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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국기독역사여행] 우리말 성서 번역 선각자, 한국 복음화 길을 열다
○일시 : 2020. 02. 05
○출처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76911
○내용
지난달 26일 종일 비가 내렸다. 한국 개화기 선각자이자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인 이수정 선생의 궤적을 찾아 산길을 헤맸다. 노령산맥 설산(525m)과 괘일산(440m) 사이 고갯길이었다. 이수정 태생지인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이수정연구회 오주현 목사(곡성 성산교회)와 정병영 실장(옥과고교)이 동행했다.
한국교회사에서 이수정은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이다. 그는 1883년 7월 일본에서 성서 번역작업 등을 추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문안드립니다’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 편지를 미 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발송했다. 그의 편지 일부는 그해 12월 미국 선교 잡지 ‘더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게재됐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전도 여행 중 마게도니아인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6~10)는 호소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가 유럽 복음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는데 이수정도 이처럼 “우리가 불행히도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며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이수정은 1882년 실력자 박영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기독교인이자 유명 농학자였던 쓰다센으로부터 개화 및 기독교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쓰다센은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불빛이 이 방안을 비추는 불빛이라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이 세상을 비추는 태양과 같아서 이 세상 그늘진 곳까지도 다 비추일 수 있다.”
이수정은 이듬해 4월 도쿄 노게스초교회에서 선교사 낙스의 입회 아래 야스카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그곳에 머물며 한문성경 ‘현토한한신약전서’에 이어 1885년 2월 국한문 성경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번역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첫 한글 번역 성서를 들고 두 달 뒤 제물포에 당도하는 것이다.
미 선교잡지 ‘포렌 미셔너리- 저팬 엔 코리아’(1884년 9월)의 기록에도 이수정 얘기가 나온다.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개종한 한국인들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선교본부는 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임명했다.…(언더우드는) 동경에 있는 한국인 신자에게 잠깐 한국말을 배울 것이다.’
조선의 첫 세례자와 다름없는 이수정의 호소가 갖는 여파는 하나님 주관하심을 실감케 한다. 한·미 친선 보빙사의 미국 방문(1883년) 때 조선 사절단을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조선 선교를 결심했던 가우처 총장과 재일 선교사 매클레이(1824~1907)를 움직인 것이다. 이수정 선교 편지에 감복한 가우처가 매클레이를 조선에 보낸다. 고종을 만난 매클레이는 ‘의료’와 ‘교육’ 개방의 성과를 얻어낸다. 이수정과 고종 측근 김옥균 라인에 의해 1884년 7월 국가 차원의 기독교 문명 개방이 이뤄졌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부터 1886년 별세하기까지 4년여를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오군란으로 쫓기던 명성황후를 보호해 공신이 됐다가 갑신정변에 참여, 순교했다는 기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실증사학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성경 번역 작업을 행한 일본에서의 행적은 확실하나 태생과 순교 등은 검증이 덜 된 상태다.
태생지는 서울과 곡성 옥과로 갈린다. 2013년 학술연구보고서(개신대학원·곡성군)는 일본 동경어학교 교사였던 이수정이 앓아눕자 옥과에 사는 아버지 이병규가 일본을 방문했다(1885년 12월 15일자 일본 시사신보)는 내용 등을 근거로 옥과로 추론하고 있다. 여러 구전도 옥과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사망과 관련해서 교계는 순교(‘명치학원 백년사’의 추모문)로 단정 짓는다. 병사설(이노우에 가쿠고로 글)과 배교설(백낙준 박사)도 있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결론은 아니다.
어쨌든 ‘한국의 마게도니아인’ 이수정은 첫 한글성서 번역자이다. 이 성서를 바탕으로 천대받던 백성은 문맹을 탈출했다. 그리고 평등사상 확산과 신분질서 타파로 이어졌다. 근대역사연구 관점에서 이수정은 ‘개화파 선각자’이다. 그의 성서번역으로 기독교 문명이 도래했고, 그의 진보적 사상으로 근대 ‘의료·교육’이 뿌리내렸다. 한국 교회가 이수정을 ‘첫 한글성서 번역자’로 묶으면 안 되는 이유다. ‘개화사상가 이수정 선생’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 싶다.
‘설산·괘일산 고갯길’은 이수정이 옥과현(縣) 집에서 출발해 순창 전주 공주 천안 등으로 이어지는 한양길 첫 고개다. 사료를 종합하면 왕족 전주이씨 이수정 가문은 정치적 이유로 깊은 괘일산 중턱 마을에서 숨어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정치적 해금을 맞은 이수정 부자가 이수정의 나이 스무 살이 넘어 출향의 기회를 잡고 옥과~순창 고개를 숱하게 넘었다는 것이 향토사연구가들의 주장이다.
현재 이수정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성림청소년수련원(광주 성림침례교회)이 자리한다. 이는 옥과 출신으로 일경의 박해를 피해 이 산자락에서 절 공부를 했던 우암학원 조용기(94) 설립자의 증언 등에 따른 것이다. 그는 남부대학·전남과학대·옥과고교 등을 세웠고 현재 옥과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 1903년 설립된 이 지역 첫 교회 옥과교회는 이수정기념실을 두고 있다.
옥과에 닿기 전 옛 여산현(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들렀다. 여산 읍치(邑治)는 천주교 순교지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스토리텔링에 강했다. 조선말 헌종·철종·고종 시기 산 기독교 개화사상가 이수정. 한국교회는 그 예언자를 기리지도, 그렇다고 연구하지도 않는다. 개교회 중심의 한국교회에 막혀 고개 넘기가 힘들다.
곡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일시 : 2020. 02. 05
○출처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76911
○내용
지난달 26일 종일 비가 내렸다. 한국 개화기 선각자이자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인 이수정 선생의 궤적을 찾아 산길을 헤맸다. 노령산맥 설산(525m)과 괘일산(440m) 사이 고갯길이었다. 이수정 태생지인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이수정연구회 오주현 목사(곡성 성산교회)와 정병영 실장(옥과고교)이 동행했다.
한국교회사에서 이수정은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이다. 그는 1883년 7월 일본에서 성서 번역작업 등을 추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에 있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문안드립니다’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 편지를 미 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발송했다. 그의 편지 일부는 그해 12월 미국 선교 잡지 ‘더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게재됐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전도 여행 중 마게도니아인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6~10)는 호소에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가 유럽 복음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는데 이수정도 이처럼 “우리가 불행히도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며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이수정은 1882년 실력자 박영효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기독교인이자 유명 농학자였던 쓰다센으로부터 개화 및 기독교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쓰다센은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불빛이 이 방안을 비추는 불빛이라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이 세상을 비추는 태양과 같아서 이 세상 그늘진 곳까지도 다 비추일 수 있다.”
이수정은 이듬해 4월 도쿄 노게스초교회에서 선교사 낙스의 입회 아래 야스카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그곳에 머물며 한문성경 ‘현토한한신약전서’에 이어 1885년 2월 국한문 성경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번역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첫 한글 번역 성서를 들고 두 달 뒤 제물포에 당도하는 것이다.
미 선교잡지 ‘포렌 미셔너리- 저팬 엔 코리아’(1884년 9월)의 기록에도 이수정 얘기가 나온다.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개종한 한국인들의 요청과 같은 것이다. …선교본부는 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임명했다.…(언더우드는) 동경에 있는 한국인 신자에게 잠깐 한국말을 배울 것이다.’
조선의 첫 세례자와 다름없는 이수정의 호소가 갖는 여파는 하나님 주관하심을 실감케 한다. 한·미 친선 보빙사의 미국 방문(1883년) 때 조선 사절단을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조선 선교를 결심했던 가우처 총장과 재일 선교사 매클레이(1824~1907)를 움직인 것이다. 이수정 선교 편지에 감복한 가우처가 매클레이를 조선에 보낸다. 고종을 만난 매클레이는 ‘의료’와 ‘교육’ 개방의 성과를 얻어낸다. 이수정과 고종 측근 김옥균 라인에 의해 1884년 7월 국가 차원의 기독교 문명 개방이 이뤄졌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부터 1886년 별세하기까지 4년여를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오군란으로 쫓기던 명성황후를 보호해 공신이 됐다가 갑신정변에 참여, 순교했다는 기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실증사학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성경 번역 작업을 행한 일본에서의 행적은 확실하나 태생과 순교 등은 검증이 덜 된 상태다.
태생지는 서울과 곡성 옥과로 갈린다. 2013년 학술연구보고서(개신대학원·곡성군)는 일본 동경어학교 교사였던 이수정이 앓아눕자 옥과에 사는 아버지 이병규가 일본을 방문했다(1885년 12월 15일자 일본 시사신보)는 내용 등을 근거로 옥과로 추론하고 있다. 여러 구전도 옥과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사망과 관련해서 교계는 순교(‘명치학원 백년사’의 추모문)로 단정 짓는다. 병사설(이노우에 가쿠고로 글)과 배교설(백낙준 박사)도 있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결론은 아니다.
어쨌든 ‘한국의 마게도니아인’ 이수정은 첫 한글성서 번역자이다. 이 성서를 바탕으로 천대받던 백성은 문맹을 탈출했다. 그리고 평등사상 확산과 신분질서 타파로 이어졌다. 근대역사연구 관점에서 이수정은 ‘개화파 선각자’이다. 그의 성서번역으로 기독교 문명이 도래했고, 그의 진보적 사상으로 근대 ‘의료·교육’이 뿌리내렸다. 한국 교회가 이수정을 ‘첫 한글성서 번역자’로 묶으면 안 되는 이유다. ‘개화사상가 이수정 선생’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 싶다.
‘설산·괘일산 고갯길’은 이수정이 옥과현(縣) 집에서 출발해 순창 전주 공주 천안 등으로 이어지는 한양길 첫 고개다. 사료를 종합하면 왕족 전주이씨 이수정 가문은 정치적 이유로 깊은 괘일산 중턱 마을에서 숨어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정치적 해금을 맞은 이수정 부자가 이수정의 나이 스무 살이 넘어 출향의 기회를 잡고 옥과~순창 고개를 숱하게 넘었다는 것이 향토사연구가들의 주장이다.
현재 이수정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성림청소년수련원(광주 성림침례교회)이 자리한다. 이는 옥과 출신으로 일경의 박해를 피해 이 산자락에서 절 공부를 했던 우암학원 조용기(94) 설립자의 증언 등에 따른 것이다. 그는 남부대학·전남과학대·옥과고교 등을 세웠고 현재 옥과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 1903년 설립된 이 지역 첫 교회 옥과교회는 이수정기념실을 두고 있다.
옥과에 닿기 전 옛 여산현(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들렀다. 여산 읍치(邑治)는 천주교 순교지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들은 스토리텔링에 강했다. 조선말 헌종·철종·고종 시기 산 기독교 개화사상가 이수정. 한국교회는 그 예언자를 기리지도, 그렇다고 연구하지도 않는다. 개교회 중심의 한국교회에 막혀 고개 넘기가 힘들다.
곡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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