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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과 도지샤대학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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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8-26 12:31 조회9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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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과 도지샤대학 설립자 니지마 죠와 연관성
*한시병풍, 김수진 목사.


역사학자이며 장신대 교수를 지낸 김수진 목사가 지난달초 한국 기독교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이수정(李樹廷 1882∼1886)의 독실한 신앙을 엿볼 수 있는 한시 병풍을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창설자 니지마 조 생가에서 발견,최근 공개했다. 김수진 목사의 기고를 통해 이수정의 신앙과 삶을 재조명해 본다.

지난달 초 ‘일본기독교의 발자취’라는 원고를 탈고하고 사진을 구하기 위해 일본의 오사카 교토 나고야 도쿄를 다녀왔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사에 큰 공헌을 한 이수정이 일본에 남긴 신앙 한시 병풍이 교토 도시샤대학 창설자 니지마 조 생가(1985년 교토시 유형문화재로 지정)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나섰다.

다행히 니지마 죠 옛 저택에 몇 번 가본 일이 있어서 쉽게 찾았다. “도시샤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한국에서 온 김수진 목사이며 이곳에 한국인 이수정의 병풍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말하자 책임자가 안내해줬다. 니지마 조의 생가 1층에 자리잡고 있는 방을 안내하면서 두꺼운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순간 이수정의 병풍이 어느새 서쪽하늘에 넘어가는 햇살 아래 밝은 빛을 내쏟고 있었다.

순간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역시 한국이 낳은 위대한 학자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도 이 정도의 글씨를 쓰려면 3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나를 안내했던 책임자도 병풍에 대한 나의 진지한 모습에 놀라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일본에 이수정에 대한 글씨로 남겨진 것은 이 병풍 하나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흔적은 1883년 5월8∼12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독교대회 기념사진에서 볼 수 있다. 맨 앞자리 중간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로 이수정(우측에서 4번째)이다. 오른쪽에서 세번째는 일본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유하사 장로,다섯번째는 이수정에게 한자 신약성서를 전해주었던 쓰다 젠 농학자이다. 이수정 바로 윗줄에 있는 사람이 니지마 조 목사이며 그 왼쪽이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이다.

이 병풍을 남긴 이수정은 누구인가. 그는 지금부터 200년전인 임오군란 때 민황후를 남장시켜 지게에 지고 궁궐을 무사히 빠져나가 충주로 피신시킨 인물이다. 난이 평정되자 이수정은 민황후를 살린 은인이 됐다. 민황후는 이수정에게 “나라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도와달라”고 말했으나 이수정은 거절하고 대신 “2차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갈 때 비수행원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1882년 9월 이수정은 일본 상선 메이지마루에 몸을 싣고 일본에서 유명한 농학자인 쓰다 젠을 만나고 성경책을 선물받으며 전도를 받는다.

“이 성경책에 든 예수는 세상을 비치고도 남을 정도로 환한 빛을 가지고 있다”는 쓰다 젠의 말에 놀란 이수정은 숙소에서 마태복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이수정은 평창 이씨로서 한국에 천주교를 최초로 전한 이승훈과 같은 집안이다. 이수정은 그 길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나가다(長田信行) 목사를 소개받고 성서와 교리를 공부했다. 다음해인 1883년 4월29일 로월정교회(현 시바교회=芝敎會)에서 낙스 선교사와 야스카와(安川亨)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를 받은지 얼마 안된 1883년 5월 제3회 일본기독교대회 지도자가 모였을 때에 오시가와 목사의 권유로 이수정은 한국어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모인 회중이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아멘” 할 때 모두 한목소리로 하였다고 우치무라 간조는 말하고 있다. 그후 이어서 서경공회(현 도시샤교회) 니지마 조 목사가 성례전을 배풀고 이어서 설교를 하였다. 이때 이수정은 즉석에서 한시를 지어 서경공회 교인들에게 증정했다. 그 한시를 한글로 번역,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고

사랑함과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그 나무 뿌리가 마름과 같도다.

사랑하는 마음은 물과 같아서 뿌리를 윤택케 하나니

가을과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그 뿌리가 마르지 아니하느니라.

항상 봄과 같아서 싹이 나고 꽃이 만발하여 잎이 무성하도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을 믿으면 꽃이 피고 얽히고 설킨 가지마다

열매가 가득하니 그 깊음이 있고 심히 크고 달도다.

그 몸통은 소나무와 잣나무 같아서 눈과 서리가 가히 시들게 하지 못하느니라.

서경공회(西京公會=필자주 현 도시샤대학교회) 형제자매들에게/圓心 朝鮮 李樹廷”

이수정의 유일한 이 한시가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창립자 니지마 저택에 소장돼 있던 것을 2000년 모모야마대학 다이다 명예교수가 발견,일본 학계 큰 화제가 됐었다. 여기에 다가시로비(多賀城碑)의 석본(石本)과 함께 하나의 병풍을 만들어 잘 보관된 것을 이번에 발견한 것이다.

이수정의 한시를 읽어보면 그의 신앙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이수정은 개화파로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보수파의 정적에 의해 1886년 5월에 44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당했다. 이 한시는 그가 처형된지 114년만에 발견되었으며 119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됐다는 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수정은 1883년 7월과 11월에 선교사 유치운동을 위해서 미국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그의 서신이 미국 선교잡지에 소개돼 젊은 실업자가 5천달러를 내놓았고 한국선교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1884년 9월 의사 앨런이 인천항에 도착했으며 1885년 4월5일 부활절 오후에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에 상륙하면서 한국 선교는 수난과 역경속에서 아름다운 성장의 열매를 맺게 됐다. 이수정은 40세에 도일하여 44세로 한국땅에서 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영광을 한국교회에 남겨놓게 됐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신비할 수가 없다.


출처] 국민일보, 이수정 한시병풍, 김수진 목사<전 장신대 교수>, 2002.08.18. 오후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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